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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번호 : 5 등록일 : 2011-01-12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유교의 예법을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모시는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위를 모셨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조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 정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왜 종묘를 세우는가?

 

종묘의 건립은 유교의 조상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혼을 모시는 사당과 백을 묻어 모시는 무덤을 각각 만들어 조상을 숭배하였다. 특히 죽은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를 만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조선 왕조와 관련된 책이나 드라마에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또는 "종사를 어떻게 하려고...." 와 같은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종사는 종묘와 사직을 합친 말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왕의 장례식

 

국장이라 하는 왕의 장례는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과 인력으로 치러졌다. 승하한 왕과 왕비에게는 흰 비단 옷으로 만든 수의를 9겹 입혔다. 소렴(2~3일 내에 하는 염습의 처음 절차)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5일 후에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절차)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혔다. 왕의 승하 후에는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5일간 장이 열리지 못하며, 3개월까지 혼인과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흙에 닿을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 되기에 동빙고에 저장해 둔 얼음을 이용하여  일종의 냉동 영안실을 만들어 놓고 5개월의 긴 장례기간 동안 시신을 보관하였다.

종묘_유교 세계관을 반영한 시설물들 2011-01-12
덕수궁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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